<왕의 남자> 원작 연극 <이>를 보러 가다 3
 
저 자신이 문화적 감수성을 독서로부터 얻었고, 그림이나 영상을 만들기보다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긴 하지만 제겐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여러 방식들을 두루 향유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침묵도 필요하고 잡담도 필요하고 토론도 필요하고, 스킨십과 눈빛 교환도 필요하듯이 소설만 읽어서는, 영화만 봐서는 살 수 없어요. 때론 연극도 봐야 하고 노래 가사를 음미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이야기지만, 다 같은 이야기는 아니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 구절은 원론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것들인 반면에, 좋아하는 노래 가사는 센티멘탈하고 간결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이 다르고, 그 방식에 따라 적절한 내용과 표현이 있기 때문이죠. 저는 그것들이 잘 어울리는 순간을 발견했을 때 즐거워합니다.

그러므로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 저는 줄거리를 좇아가기 위해 급급해하지 않아요. 제가 연극이나 영화에서 얻기 원하는 것은 한 문단의 시놉시스가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어떤 장면을, 화면의 구조를, 장면과 장면 간의 연결을, 어떤 표정을 얻기를 원합니다. 언어가 아닌 비언어로 일러주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감동하기를 원합니다. 글 한 구절을 외우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연극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되새기는 것은 나만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연극을 볼 때는 연극적인 요소를, 영화를 볼 때는 영화적인 요소를 눈여겨보게 됩니다. 매체 나름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것을 변주하려는 매체적 시도를 지지하게 되고요. 물론 가끔은 머리로만 이해가 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만 그런 경우에도 최대한 관용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왜냐하면 무대나, 카메라를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이용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연극이나 영화보다는 그런 것들이 적어도 더 정성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제가 말하는 '영화적' 요소라는 것이 <야수>에서 남용된 줌인 줌아웃, 핸드 헬드 등의 기법처럼 화면을 현란하게 만들고 카메라의 존재를 끊임없이(혹은 피곤하게) 인식시키는 기술적 측면의 요소는 아니에요. 오히려 찰리 채플린이라는 배우의 얼굴에 가득 새겨진 페이소스를 고요히 응시할 줄 아는 <시티 라이트>의 클로즈업 쪽에 가깝죠.
 혹은 막 남루한 농장을 탈출해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펠레의 걸음을 연민의 심정으로 그러나 결코 감상적이지 않게 응원하는 <정복자 펠레>의 사려 깊은 부감의 시선이나, 겉으로는 활달하고 아름답지만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한 여자의 황량한 내면을 은유하듯 망연히 거울 앞에 벌거벗고 앉은 그녀를 담아낸 <스테이션 에이전트>의 정적인 미장센 같은 것들이죠. 혹은 일제시대 독립 운동을 한 혐의로 김주혁이 고문을 당하는 끔찍하고 처절한 장면에서 한순간 푸르고 평화로운 창공의 풍경으로 도약해버리며 박경원이 진정으로 소망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청연>의 대담한 편집이나


여인의 육체를 탐하듯 미끄러지는, 그야말로 손과도 같은 <더 핸드>의 촉시적인 카메라, 주로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을 담당한 성우의 근엄한 목소리로 '이 영화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오마주 같은 거 아님' 같은 발랄한 구절을 읊도록 함으로써 냉소적인 우화의 성격을 드러내는 <신성일의 행방불명>의 그로테스크한 나레이션이죠.



연극 <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졌군요. 결론은 단순명쾌합니다. <이>가 연극적이어서 좋았다는 거예요. 결국 영화 이야기를 하고 말았지만 직업병이라고 이해해주세요^^; 연극적이고, 영화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건 그저 제 취향일 뿐이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께도 그런 즐거움을 조금은 나누어드리고 싶었습니다.
by 박우진 | 2006/02/15 11:58 | 컬럼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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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도요새 at 2006/02/15 15:53
글 읽는 내내 끄덕끄덕......
저도 올해는 그래서 연극을 많이 볼구요. 영화도 좋아하지만, 너무 문화적 편식이 심한듯해서요. 개인적으로 언젠가 다시 원년멤버 <이>가 재공연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때 배우들을 편애하는 관계로.^^
Commented by 긴오후의하늘 at 2006/02/15 18:08
Absolutely agree!
Commented by 박우진 at 2006/02/17 01:54
도요새님/ 편식은 건강에 안 좋죠^^ 저도 원년멤버가 돌아온다면 또 보러 갈래요~
긴오후의하늘님/ 동의하신다니 마음이 든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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