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원작 연극 <이>를 보러 가다 2

두번째 이유는, 장생 역에 캐스팅된 배우 감우성이 아닐까 해요. 사실 처음부터 장생 역에 감우성이 캐스팅된 건 아니었어요. 내정되었던 배우가 군복무 문제로 출연할 수 없게 되면서 그가 맡게 된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좀더 어리고 건들거리는 장생을 보게 되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캐릭터는 배우의 몸을 빌어 미묘하고도 결정적으로 변주되는 법. 감우성이 연기한 장생은 묵직하고 호탕하고, 처연하죠. 마치 오래된 가구 같다고 할까요. 한 구석에 조용히 놓여 있어도 그 존재감으로 방 전체의 공기를 장악하는, 오래된 가구 말이죠. 감우성이 그런 기운을, 장생에게 불어 넣습니다. 본래 이미지만으로 만들어낸 캐릭터는 아니었어요. 감우성은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이도록 줄을 타고, 시나리오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았던 얼굴의 상처를 스스로 그려넣었죠. 그 상처는 장생의 히스토리이자 일종의 <왕의 남자> 외전이에요. <왕의 남자>가 시작하기까지 장생이 겪었을 풍파가 배어나죠. 감우성은 말합니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맨몸으로 장터에서 뛰고 구르며 궁에까지 입성한 장생에게 어떤 삶의 고비나 절절한 사연 하나 없을리 없다고. 그러니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한 입가의 상처가 숱한 이야기를, 말도 없이 증언하고 있는 셈이죠.

결과적으로 영화 속의 장생은 연극 속의 장생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통찰적인 캐릭터로 탄생했어요. 연극에서와는 달리 보스 기질이 강하고, 연산과 공길의 만남의 모티브가 됨으로써 이야기를 추진해가는 그는, 공길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가이드가 되죠. 영화를 관통하는 무게 중심이자 이야기와 관객을 매개하는 필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자, 다시 무대로 돌아가 보죠. 연극은 여러 명의 남자들이 열을 맞춰 추는 군무로 시작됩니다. 무대 뒤에선 우는 듯 웃는 듯 일그러진 가면이 흔들거립니다. 남자들의 몸이 빚어내는 격정적이면서도 강박적이고 음울한 동작들은 연산의 심정을 은유합니다. 쿵쿵, 심장박동처럼 보이고 들리는 이 군무가 연산의 내면의 풍경인 거죠.

그 외에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어요. 무대 뒤쪽, 한지를 바른 문을 통해 녹수가 연산의 아이를 낳는 모습이 실루엣 처리 되는 동안 무대 앞에서는 연산이 공길의 몸을 채찍으로 내려치는 장면도 그 중 하나였죠. 한낱 그림자로 표현된 녹수가 연산의 마음에서 저만치 물러나 버렸음을 암시하기도 하고, 비정상적으로 확대된 그 그림자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앞날의 비극을 예고하기도 하죠. 매를 주고 받는 연산과 공길 간의 애증과, 연산의 내적 갈등이 보이는가 하면, 연산을 둘러싸고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 녹수와 공길의 욕망과 고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의미가 미니멀한 무대, 단 하나의 상황으로 표현된 거죠.

'놀이' 역시 영화와는 다르더군요. 무대 위의 광대들은 영화에서보다 한층 마당극에 가까운 익살을 펼쳐보입니다. 소소하고 어처구니 없는, 말장난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섞어가면서요. 무대를 방정맞게 가로질러가거나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며 눈길을 끕니다. 웅장한 구조와 현란한 색감으로 품격을 내세웠던 영화 속의 '놀이' 장면과는 또다른, 주거니 받거니 친밀한 즐거움이 거기에 있더군요.

이런 것들 때문에 저는 <이>를 좋은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역학 관계와 인물의 심리를 '놀이'의 형식으로 풀어낸 창의적인 전복성과, 그것을 뒷받침 하는 캐릭터 묘사, 이야기 구성도 훌륭하지만 그런 내러티브적인 요소 이외에 진정으로 '연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에서 제가 꼽았던 장면들을 그대로 영화화했다면 어땠을까요? 몸동작의 질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지 않는 스크린의 군무가 과연 난해한 추상성이 아닌 피부에 와 닿는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요? 문 뒤의 녹수, 문 앞의 연산과 공길이라는 세 겹의 관계가 얇디 얇은 스크린에 담겼을 때, 무대에서의 깊이감과 다층적인 분위기를 드러낼 수 있었을까요? 무대 위의 광대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과연 관객들을 마주하고, 삿대질을 해가며 쏟아놓았던 말의 맛과 익살을 고스란히 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극을 볼 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들이란 무대 위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연극적인 것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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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우진 | 2006/02/10 11:58 | 컬럼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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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黑の風 at 2006/02/10 14:46
아... '왕의남자'란 영화가 원래 원작이 있었었군요. 게다가 연극이었다니.
연극을 많이 보진 못했지만, 그 연극의 맛을 영화의 스크린으로 옮기긴 힘들죠.
저도 '이'란 연극을 꼭 보고 싶네요.^^
Commented by JUNEI at 2006/02/10 18:41
저도 "이"를 보고 왔지만, 연극의 깊이에 푹 빠졌어요.
확실히 영화와는 좀 다른 느낌과 진지한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광대들의 한판 놀이가 정말 재밌었구요. 관객들과 호흡하는게 참 멋졌습니다 ^^

근데 그 연산의 채찍신..
옆에서 친구가 계속 연산 흉내내면서 막 sm 분위기를 내서 좀 많이 웃었어요.
사상이 썩은 저와 제 친구의 머리에서는 sm스럽더군요 ^^;;
Commented by 박우진 at 2006/02/14 16:56
黑の風님/ 기회가 된다면 꼭 보세요! 연극이 영화로 옮겨지든, 소설이 영화로 옮겨지든 그 변주 과정을 관찰해보는 것도 퍽 흥미로운 일이예요^^
JUNEI님/ 저도 사실은... 부끄럽지만... 그런 생각을 했더랬죠 ㅋㅋ. 영화건 연극이건 궁극적으로는 연산을 주인공으로 한 사이코 드라마이기도 한 것 같아요.
Commented by 도요새 at 2006/02/15 15:56
연극과 영화, 모두 잘된 작품인 듯합니다.
얼핏 본 거지만, 소학지희 장면에서의 배우들 연기는 정말~ 재밌더군요.
+++저도 그 장면은 내심...이건 SM이다, 라고 생각하며 박수를 보냈다는;(?)
연극이니까 더욱 솔직하게 동성애 코드-연산과 공길의 애증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대사들도 정말...좋아요.
Commented by 부업 at 2007/05/17 13:57
녹슬은 철모-
(자작시)
이름없는 무덤가에 놓여진
녹슬은 철모.
군번도 없는 쓸쓸한 무덤가에
녹슬은 철모많이 당신을 지키고 있네.
조국을 위해 몸바쳐 가심을
철모가 말해주고 있네.

적의 총칼앞에 쓰러져간
젊은 청춘의 넋이여.
군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군번없는 무명의 용사가 돼어버린지,
57년.
57년이 흐른 지금에야
우리는
이름없는 무덤가에,
꽃을 놓누나.

애인같이 귀하게 여기던 총칼이
조문객을 살피우고
구름이
흘러흘러
청춘의 이름없는 넋을 위로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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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무릇,
떠오르는 선수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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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지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일본)그라운드에서~~~~~~~,
들리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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