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과적으로 영화 속의 장생은 연극 속의 장생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통찰적인 캐릭터로 탄생했어요. 연극에서와는 달리 보스 기질이 강하고, 연산과 공길의 만남의 모티브가 됨으로써 이야기를 추진해가는 그는, 공길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가이드가 되죠. 영화를 관통하는 무게 중심이자 이야기와 관객을 매개하는 필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자, 다시 무대로 돌아가 보죠. 연극은 여러 명의 남자들이 열을 맞춰 추는 군무로 시작됩니다. 무대 뒤에선 우는 듯 웃는 듯 일그러진 가면이 흔들거립니다. 남자들의 몸이 빚어내는 격정적이면서도 강박적이고 음울한 동작들은 연산의 심정을 은유합니다. 쿵쿵, 심장박동처럼 보이고 들리는 이 군무가 연산의 내면의 풍경인 거죠. 그 외에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어요. 무대 뒤쪽, 한지를 바른 문을 통해 녹수가 연산의 아이를 낳는 모습이 실루엣 처리 되는 동안 무대 앞에서는 연산이 공길의 몸을 채찍으로 내려치는 장면도 그 중 하나였죠. 한낱 그림자로 표현된 녹수가 연산의 마음에서 저만치 물러나 버렸음을 암시하기도 하고, 비정상적으로 확대된 그 그림자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앞날의 비극을 예고하기도 하죠. 매를 주고 받는 연산과 공길 간의 애증과, 연산의 내적 갈등이 보이는가 하면, 연산을 둘러싸고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 녹수와 공길의 욕망과 고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의미가 미니멀한 무대, 단 하나의 상황으로 표현된 거죠. ![]() '놀이' 역시 영화와는 다르더군요. 무대 위의 광대들은 영화에서보다 한층 마당극에 가까운 익살을 펼쳐보입니다. 소소하고 어처구니 없는, 말장난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섞어가면서요. 무대를 방정맞게 가로질러가거나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며 눈길을 끕니다. 웅장한 구조와 현란한 색감으로 품격을 내세웠던 영화 속의 '놀이' 장면과는 또다른, 주거니 받거니 친밀한 즐거움이 거기에 있더군요. 이런 것들 때문에 저는 <이>를 좋은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역학 관계와 인물의 심리를 '놀이'의 형식으로 풀어낸 창의적인 전복성과, 그것을 뒷받침 하는 캐릭터 묘사, 이야기 구성도 훌륭하지만 그런 내러티브적인 요소 이외에 진정으로 '연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에서 제가 꼽았던 장면들을 그대로 영화화했다면 어땠을까요? 몸동작의 질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지 않는 스크린의 군무가 과연 난해한 추상성이 아닌 피부에 와 닿는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요? 문 뒤의 녹수, 문 앞의 연산과 공길이라는 세 겹의 관계가 얇디 얇은 스크린에 담겼을 때, 무대에서의 깊이감과 다층적인 분위기를 드러낼 수 있었을까요? 무대 위의 광대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과연 관객들을 마주하고, 삿대질을 해가며 쏟아놓았던 말의 맛과 익살을 고스란히 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극을 볼 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들이란 무대 위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연극적인 것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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