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원작 연극 <이>를 보러 가다 1


가끔 연극을 보러 갑니다. 연극을 보는 이유는, 그것이 소설과도, TV드라마와도, 포털 사이트의 뉴스와도, 친구와의 전화 통화와도, 영화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열거한 모든 문화 장르와는 또다른 종류의 정서적 경험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배우들의 호흡이, 입가의 경련과 손가락의 움직임이, 발소리가, 때로 삐끗하며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를 일그러뜨리는 애드리브와 예기치 않은 웃음과 입술을 뛰쳐나온 침 한 방울이, 활자나 카메라라는 비인간적인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내 눈과 귀와 피부에 우르르 무너지는 느낌. 평소 지구로부터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던 별의 궤도가 마침 우리집 지붕 위를 지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 같은, 그 생생하고 낯설고 아뜩해서 섬찟하기까지 한 느낌이 가끔 미치도록 그리워집니다. 제 경우에는 그럴 때, 문득 살아있음을 깨닫곤 해요. 아무리 3D 기술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저 폴라 익스프레스가 감히 스크린을 뚫고 나올리 만무함을 알고 있는, 비인간적이고 안전한 극장 관객석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감정이죠.

그래서 가끔, 여행을 가듯이 연극을 보러 갑니다. 얼마전에는 <왕의 남자> 원작인 <이>를 보러 갔었어요.

줄거리와 캐릭터는 많이들 아시리라 생각해요. 주요인물은 네 명이죠. 연산군과 장녹수, 공길과 장생이에요. 연산군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앞에 무기력했던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장녹수는 그런 연산의, 어머니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죠. 공길과 장생은 광대예요. 하지만 그들의 성격은 영화에서와는 조금 달라요.

영화에서는 한 송이 꽃처럼 여리고 순수해서 연산과 장생, 두 남자의 욕망을 촉매하는, 이를테면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었던 공길이 연극에서는 좀더 지능적이고 권력지향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의 처선의 꾀와 공길의 미모를 합친 데다 장생의 보스 기질을 가미한 것과도 같아요. 연산의 총애를 받은 그는 궁 안의 광대를 총지휘하는 위치에 오르는데, 연산 앞에서는 아부를 하고, 휘하의 광대들 앞에서는 제법 권위를 세우는 그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분열적이죠. 공길 역의 배우는 치렁치렁한 옷자락으로 몸을 꽁꽁 싸맸던 이준기와는 달리 종종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드러냅니다. 천장에 닿을 듯 하이톤의 목소리도 날카롭고 강단이 있어요.

이에 반해 장생은, 영화에서보다 훨씬 순진하고 우직한 인물이에요. 속이 훤히 보이고 더 단순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한량 기질이 농후한 그는 줄곧 일관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공길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광대로서, 그리고 공길에 대한 감정으로 궁에 입성하(는 듯 보이)지만 권력이나 명예, 돈과 출세에는 한톨 관심 없이 그저 바람처럼 자유롭게 노닐고만 싶어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공길이 일종의 판타지였다면 연극에서는 장생이 판타지인 셈입니다. 이런 뒤바뀜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일단, 게이 코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연극보다 대중적이고 비현실적인 장르이고 따라서 상식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해요. 그건 자본이나 제작 과정 상의 문제이기도 하죠. 영화는 연극보다 많고 다층적인 사람들과 돈의 관여로 만들어지잖아요. 독립영화가 아닌 이상, 사람들 간의 합의점과 넓은 범위 관객층을 소구할 수 있는 지점이 필요하고 그 수위가 상식선에서 조율되는 경우가 아무래도 많겠죠. 그것이 영화의, 특히 상업 영화의 기본적인 태도가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왕의 남자>에서 <이>의 게이 코드를 주 도화선으로 가져오려다 보니 어떤 절충점이 필요했을 거라고 봐요. 그것이 공길 역의 이준기였을 거고요. 많은 퀴어 영화들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사랑 받는 남자를 아름답게 치장하죠. 왜냐하면 그 남자가 (마치 여자처럼)아름다워지면 아름다워질 수록, 그에 대한 다른 남자의 욕망을 용납하기가 시각적으로 수월해지기 때문이에요. 떠올려보세요. <해피 투게더>의 장국영을, <토탈 이클립스>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그들의, 일시적으로나마 성(性)을 잊어버리게 하는, 유약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그 미학적인 아름다움은 정치성이 거세된, 순수함으로 오인됩니다. 그리고 한 남자라기보다는, 한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설득시키죠. 그것을 위해 배우 이준기의, 중성적인 매력이 선택되었을 거예요. 캐릭터의 외형 뿐 아니라 성격 역시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바뀌었겠죠. 세속적인 욕망을 좀처럼 내보이지 않는 그는 현실적인 인물이 아니예요. 마치 천사처럼 다른 이들을 위무하고, 연산과 장생을 비롯한 관객 모두의 애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by 박우진 | 2006/02/08 11:58 | 컬럼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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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긴오후의하늘 at 2006/02/08 12:04
거기에 덧붙여진게 소년 코드겠군요..
Commented by 길라엔 at 2006/02/08 12:36
솔직히 연극에서는 '계집이 아닌 것이 계집이고...' 이 대사를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공길 역의 배우가 굉장히 남자다웠죠. 안 어울린다거나, 그렇다기 보다는 영화를 먼저 보고 영화에 굉장히 흡족함을 느꼈던 저로서는 살짝 그랬다, 이겁니다. 하지만 영화와 연극 둘다 각각 다른 매력이 있는 작품이에요.
Commented by 도요새 at 2006/02/08 14:36
음, 정말 글 잘 쓰시네요.
연극도 보고 싶습니더~
Commented by 하민 at 2006/02/08 15:18
아... 이런 표현으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연극과 영화가 어째서 저런 차이를 둘 수 밖에 없었는지... 좋은 글, 정말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뿌리 at 2006/02/08 18:17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만 된다면 꼭 봐야겠어요!
Commented by guihui at 2006/02/08 23:15
저도 <이>를 두 번 보았는데요, 개인적으로 수동적이고 약한 영화의 공길보다는 야망에 불타지만 그래서 더 처절하게 살다 간 연극의 공길 캐릭터에 더 공감이 가더군요.
저는 아직도 연극에서의 대사들이 귓전에서 쟁쟁거려서 고생중이라죠, 히히.
글 잘 보고 갑니다 ^-^
Commented by 박우진 at 2006/02/09 01:23
긴오후의 하늘님/ 역시, 날카로우십니다^^ 이준기가 연기한 공길의 천진난만함, 아직 덜 자란, 따라서 덜 위협적인 미성년의 성질은 '놀이'가 주제이자 소재인 <왕의 남자>의 성격과도 맞물리는 것 같아요.
길라엔님/ 저도 솔직히 그 대사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거짓말 하다 들킨 아이처럼 뜨끔하곤 했어요 ㅋㅋ
도요새님, 뿌리님/ 연극 정말 강추인데요. 지금은 서울 공연 끝내고 지방 순회를 하는 중인 듯 해요. 혹 보실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하민님/ 감사합니다~^^
guihui님/ 연극에서의 공길 캐릭터가 좀더 설득력이 있다고 저도 생각해요. 하지만 준기씨의 판타지 역시 매력적이죠. 그 날렵하고 섬세한 얼굴선이라니 @.@ 아아, 저도 연극 또 보고 싶어요.
Commented by 부업 at 2007/05/17 13:57
녹슬은 철모-
(자작시)
이름없는 무덤가에 놓여진
녹슬은 철모.
군번도 없는 쓸쓸한 무덤가에
녹슬은 철모많이 당신을 지키고 있네.
조국을 위해 몸바쳐 가심을
철모가 말해주고 있네.

적의 총칼앞에 쓰러져간
젊은 청춘의 넋이여.
군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군번없는 무명의 용사가 돼어버린지,
57년.
57년이 흐른 지금에야
우리는
이름없는 무덤가에,
꽃을 놓누나.

애인같이 귀하게 여기던 총칼이
조문객을 살피우고
구름이
흘러흘러
청춘의 이름없는 넋을 위로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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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무릇,
떠오르는 선수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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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G맨이었다는 사실을 잊지말라, 그대.
G=지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일본)그라운드에서~~~~~~~,
들리는 가,
그대의 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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