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수상한 B형 남자, 지진희 4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온 사람들, 아픔도 하나씩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봄날>의 고은호도, <대장금>의 민정호도 아닌 배우 지진희로 남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배우의 역할이란 무릇 대중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때론 그 판타지가 담배 한 모금이나 술 한 잔처럼 고단한 현실을 위로한다. 그것이 폐가 좋지 않다는 건강검진 결과나, 아침의 숙취처럼 부질없고 유해한 망상일지라도 나는, 영화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을 남자 친구 삼는 사춘기 소녀의 망상을 탓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그들에게 ‘나는 고은호도 아니고 민정호도 아니다’라는 지진희의 선언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그런 무지개 같은 환상을 깨주고 싶어요. 그런 사람 없거든요.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잘 포장된 이미지도 멋있지만 그 사람이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 때 팬들이 느낄 실망감까지 생각해보면 나를 배우 지진희로 봐달라는 것이 그렇게 가혹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을 판타지로 옭아매는 시선에 저항하려 했다. 그리고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해두려고 했다. 그건 배우로서의 욕심이고 직업의식이다. 배우란, 그에게 철저히 직업이다.

 

"나는 인간 지진희일 뿐이에요. 배우가 아닌 나의 모습은 대중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나도 내 자유를 느끼고 싶거든요.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발가벗은 느낌이에요. 거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위안 받고, 힘을 얻을 수 있는 내 사생활까지 보이고 싶진 않다는 거죠. 팬들이 지진희를 사랑한다면 인간 지진희를 인정해주었으면 해요." 



우리는 제 이미지에 갇혀 질식사한 아이돌 스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지진희의 이런 단호함은 결국 배우를 평생직업으로 삼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평생 할 거에요. 이제 얼굴 다 팔려서 다른 일도 못해요.(웃음) 그렇다고 역사에 길이 남을 대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고. 내가 연기하는 이유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예요. 평생 직업으로는 이것처럼 훌륭한 직업이 없는 것 같아요. 정년퇴직도 없잖아요.(웃음)" 

 

슬쩍슬쩍 농담을 섞어가며 늘어놓는 이 남자의 너스레에 그러나, 방심해버리면 안 된다. 착해 보이는 눈은 검고 깊다. 그 어둠은 무(無)지만 또한 어떤 것이 감추어져 있을지 모르는 미지이기도 하다. 그 눈빛이 신랄해지는 순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인기요? 그건 그냥 순간이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 혹하긴 해요. 하지만 팬들이 오빠, 오빠하는 모습, 물론 고맙고 즐겁지만, 너무 오래 갖고 있으면 안돼죠. 으쓱한 만큼 나중에 초라해지니까. 내가 이랬는데 너희들 뭐야 그런 마음이 생겨요. 세상 사람들이 내 발밑에 있는 것처럼 붕 뜨는 그런 기분, 거품이죠. 눌러줘야 해요. 그렇지 못하면 나중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허공에서 헤매게 되니까. 그런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우리 다 봤잖아요."



그의 이런 냉소는 아마도, 새삼스럽지만, 여러 직업을 거친 뒤 제법 늦은 나이에 배우로 데뷔한 이력 때문일 것이다. 배우로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성장한 후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의 고민과 판단과 결심의 부산물.

 

"주변에서 자기 아이가 예쁘다고 연기자 시키고자 하는 부모도 많아요. 솔직히 자기 자식, 다 예쁘죠.(웃음) 그런데 객관적으로 봐서 안 예쁘고, 안 될 것 같으면 난 다 얘기해줘요. 정말 하고 싶다고 하면 대학교 졸업한 다음에, 배울 거 다 배우고 사회생활 좀 경험해보고 자기 관리 하는 방법도 익힌 다음에 하라고 해요. 그때도 늦지 않아요. 어차피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되니까."



2000년에 데뷔했으니 벌써 7년째다. 지난 행보에 대해선 ‘후회 없다.’ 당시에는 최선을 다 했으니까, 라는 것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이유다. 이미 지나간 일 후회해 뭐해요, 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하더니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관리가 철저한 안성기 선배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뷰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더 이상 헛갈리지 않았다. 그에겐 언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천진함과 치열함, 쿨함과 예민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 그런 자신의 삶을 한 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해주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듣기엔 그랬다.


“현재가 가장 중요하죠. 현재에 충실하면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되는 거니까.”

by 박우진 | 2006/01/27 11:59 | 컬럼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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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마니 at 2006/01/28 02:14
민정호의 이미지가 나아요, 고은호는 너무 가엽잖아요...
멋지군요 역시 지진희 멋진 배우로 앞으로도 쭈욱 그래주기를
Commented by UF노루 at 2006/02/01 18:06
멋지네요... 이토록 수상한 지진희씨... 전 파란만장 미스김의 추리닝 입은 모습이 계속 떠오르는데.ㅎ
Commented by 요연 at 2006/02/22 15:58
저도 최근 여교수..때문에 쏟아지는 지진희의 인터뷰를 보면서 지진희의 매력에 실감하고 있어요. 되게 멋지던데요. 하는 말이 하나하나 주옥같아요 ㅎ 작년 엑스파일에서 지진희보고 [지금이 맥시멈]이라고 했었는데 인터뷰를 보니깐 그런 엑스파일 기사를 보고 왠지 지진희는 픽하고 웃어 넘겼을 것 같다는 생각. 인터뷰를 보니 지진희는 앞으로가 더 멋져질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얼마나 괜찮았을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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