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모습 처음이었다. ‘잠바때기’를 걸치고 나타난 지진희는 앉자마자 테이블 위의 샌드위치부터 집어 들었다.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었다고 했다. 입 안 가득 샌드위치를 물고는 그야말로 볼 멘 소리로 “괜찮죠?”라고 물었다. 아무렴, 괜찮고말고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달 홍콩에서였다. <퍼햅스 러브> 프리미어 취재차 갔던 것인데, 그는 우리를 보고 (물론 아주 사적인 생각이지만)적잖이 반가워했다. 그는 홍콩의 진가신 감독이 연출하고 아시아 각국의 스탭, 배우들이 참여한 이른바 ‘범아시아 프로젝트’인 그 영화의 홍보차 아시아 각국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한국 기자단만을 위해 마련된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제껏 지진희에게 들은 대답 중 가장 긴 대답’으로 진가신 감독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통역을 거치지 않아도 말이 통한다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 때문이었을까. 그의 표정에는 처음 놀이공원에 놀러간 아이마냥 옅은 흥분기마저 서려 있었다. 첫인상은, 그랬다. <퍼햅스 러브>에서 마침 그가 맡았던 천사 몬티처럼 천진한 사람.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는 사람은, 또 다르다. 아이 같은 느낌은 여전한데 어딘가 심드렁하고 짓궂은 데가 있다고나 할까. 천사였던 지진희는 개구쟁이가 되어 돌아왔다. 아마도 올 2월 개봉을 앞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은 만화가 석규다. 직업도 직업이지만, 무엇보다 그에게는 파란만장한 과거가 있다. 동네마다 한 무리는 꼭 있었을, 건들대며 사고치던 양아치 혹은 날라리라 불리던 시절이. 그는 “양복도 꼭 끼는 것보다는 약간 헐렁한 것이 좋다. 이번 영화는 헐렁한 양복 같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알고 있던, 지진희 자신이 기대어온 중후한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다.
의외로, 그가 B형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 선배가 지진희를 인터뷰했을 때, 그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모두 모여서 밥을 먹다가, AB형이 갑자기 뛰쳐나가면 O형은 뒤쫓아 가고, A형은 ‘쟤, 나 때문에 저래?’ 하는데 B형은 그냥 밥만 먹는다는. “그렇다니까요. 밥 먹다 누가 가도 전혀 신경쓰지 않아요.(웃음) 가고 싶으면 가고 먹고 싶으면 먹고 하는 거지 뭘. 그런 것 때문에 걱정하거나 후회하거나 한 적 결코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아님 말고.” 아, 무심하기도 하다. 마음 속 한켠에 자리하고 있던 민정호가 와르르, 무너진다.
"군대가기 전까지는 A형인 줄 알았죠. 그런데 내가 좋아한 사람들이 전부 성격 '드러운' B형들이었어요. 자기 기분에 따라 화내고, 괴팍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들. 그런 예술가적인 기질이 나는 결코 나쁘게 보이지 않더라고요. 좀 과걱하긴 하지만.(웃음) B형이 참 독특하고 매력적인 혈액형이구나, 하지만 결혼하기에 좋은 상대는 아니겠구나.(웃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B형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쉬워했죠.(웃음) 한편으로는 매우 즐겁기도 하고. 난 B형인데 왜 이럴까, A형의 성향을 많이 가진 B형인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B형스러운 모습이 많이 나타나더라고요. 엉뚱하고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면이 있어요. 그럴때 B형이라는 것을 실감하죠."
혈액형별 성격에 대한 나의 믿음은 공교롭게도, 세월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록, 더욱 굳어져만 가고 있다. 편견일지 모르지만, 이 B형 남자, 더없이 젠틀하다는 항간의 소문에도 불구하고, 쉬운 상대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문득 든다. 그런데 이 남자, 불쑥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샌드위치를 방심한 내 손에 들려준다. 드세요. 직접 두유도 따라준다. 제가 안 미안하게 좀 드세요. B형은 이런 거에 구애받지 않아요. 배우는 진정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란 것이 새삼 실감난다. 마음을 가다듬는다. 홀리지 말아야지,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