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올바른 <뮌헨>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 3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는 에브너의 인간성을 가정적인 면모에서 찾죠. 그는 아내가 임신해서 곧 아버지가 될 가장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거나 동료들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것을 보면 분명 좋은 가장이죠. 이런 식의 캐릭터 설명이 몇 번이고 반복됩니다. 문득 좋은 가장이라는 점을 뺀다면 에브너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습니다. 감독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인간적인 캐릭터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꾸만 가족을 언급합니다. 그것도 대안적인 가족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가족이 아닌, 협소하고 전통적인 범위의 가부장적 가족 말이죠. 그것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지난 행보에서 계속 지적되어 왔던 보수성과 편협함이기도 합니다. 가족을 빗대지 않고는 캐릭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큰 단점이 되지는 않습니다만 한계가 되기는 하죠. 가족에 대해 별로 언급되지 않는 모사드 팀원들의 캐릭터는 단조롭습니다. 그들의 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식탁에 둘러 앉아 차례차례 자기 소개를 하는 장면을 집어 넣지만 캐릭터는 그런 노골적이고 일회적인 방법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죠. 캐릭터는 관계 속에서 설명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반응,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방식 등등이 모여야 비로소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누구누구고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해요, 라는 자기 소개만으로는 그 의외성과 복합성을 다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가족을 끌어 오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팀원들 간의 관계를 통해 캐릭터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딱히 팀원들 간의 관계가 세심하게 표현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그들 각자를 인간적으로 묘사하고 있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누군가는 아버지로 만들었고, 누군가는 장을 보게 했으며, 누군가는 생면부지의 에브너에게 인사를 건네도록 만들었고, 누군가는 동료들과 웃고 떠들도록 만들었죠. 지난번 글에 어떤 분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묘사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테러가 정당화된 것은 아니라는 덧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음미해 볼만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진정으로 공평하고 휴머니즘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그런 피상적인 인간성 묘사보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제시해주는 편이 더 사려 깊지 않았을까요? (비공개 덧글이었지만 이런 부분을 더 생각하게 해주신 Mr-Bart님께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3월 5일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날입니다. 처음부터 오스카를 노리고 만든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던 <뮌헨>은 예의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5개 부문 후보에 올랐죠. 그러나 그것이 <뮌헨>이 오스카를 받을 만큼 훌륭한 영화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열린 미국 내 많은 영화 시상식에서 <뮌헨>은 거의 외면 받다시피 했거든요. 아카데미 시상식의 바로미터 격인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뮌헨>을 선택한 것은 올해 아카데미의 정치적 성향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예년에 비해 유독 정치, 사회적 발언을 하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성 정체성 문제를, <크래쉬>는 인종 차별 문제를, <카포티>와 <굿 나잇, 앤 굿 럭>은 언론 윤리의 책임 문제를 다뤘죠.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만 해도 세 편이고 9.11, 이라크 전 등을 겪으면서 미국 영화가 공적인 영역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분석이 나오는 판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노미네이트된 데 대해 아카데미가 내 영화를 알아봐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카데미가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을지 의심스러웠다는 소감을 밝혔죠.

 

물론 유대인 감독으로서 이런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까지 용기가 필요했을 거고, 최선을 다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번 글에 Reverend-L님께서 달아주신 덧글처럼 그가 미국과 이스라엘 눈치를 보느라 정작 정말 자기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안전하게 돈도 벌고 아티스트로서의 명성도 안전하게 얻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내 영화는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내 영화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사를 하고, 그 대사를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작가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내가 감히 논할 자격이 있나 싶을 정도로 복잡한 것이다라며 자신의 영화가 비정치적인 것임을 강조하며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영화 감독이라 하지만, 그도 종국엔 사람들의 비판에 상처 받고, 국적에 따른 정체성을 지닌 한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그가 이 영화가 미칠 파장에 대해서 충분히 가늠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입장을 좀더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해 책임감을 가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감독이 그런 태도를 지니지 못했을 때, 영화는 다만 선정주의적 시도로 전락할 수 있거든요.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안은 이목을 끌게 마련입니다. 특히나 지금의 미국처럼, 신경이 곤두선 사회에서는요. 게다가 그런 사안을 다루면 의식 있는 감독으로 인정 받을 확률도 높아지겠죠.

 

제가 감독님들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걸까요? 반쯤은, 창작자들에 대한 질투 섞인 존경심 때문일지 몰라요.^^; 그러나 저는 <뮌헨>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라는 평들을 읽었을 때 좀 당황했고, 사람들이 믿는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말하는 구나 느꼈고, 그래서 저 역시 믿는 대로, 듣고 싶은 대로 한번 써볼까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해서(<뮌헨>이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지는 좀더 논의해볼 문제지만) 영화적으로 좋지 않은데도 지지해야 할까요? 명분이 모든 허점을 정당화한다고요? 언론의 호의적인 평들을 접하면서 <뮌헨>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건 어쩐지 정치적으로 의식 없는 일처럼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음음, 어쨌거나 요지는 어서 이 폭력의 악순환이 그쳤으면 하는 거예요.
by 박우진 | 2006/02/24 11:58 | 컬럼 | 트랙백(4) | 덧글(9)
정치적으로 올바른 <뮌헨>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 2

일단 영화 내적으로 살펴보죠. <뮌헨>이 전제하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현실성'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이 단순하고 평면적이어서 공감이 가지 않았어요. 사실 지난 달 <뮌헨>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에릭 바나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뒤지다가 미국 저널이 그가 맡은 에브너 캐릭터에 대해 '한계 상황에서 믿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분열해가는 인물'이라고 설명했기에 궁금해 했거든요. 기대가 컸었나봐요. 제가 본 에브너는 그다지 매력이 없더군요. 처음 그가 임무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타당성(자신을 험한 상황으로 내모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 말이죠)도, 살인을 거듭할수록 변화하는 모습도 치밀하게 묘사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내적인 묘사가 부족했던 거죠. 물론 주인공이 내적 갈등과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를테면, 독백과 같은 과시적인 방식의 묘사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복선을 깔아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시각적인 상징이나 생각없이 흘리는 듯한 말 한마디, 무심코 취하는 행동 하나일 수도 있겠죠. 때론 당장의 내러티브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런 요소들이 쌓이고 쌓여 종국에 하나의 정서적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뮌헨>은 폭력의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데 급급한 것처럼 보였어요. 사건 진행의 긴박감도 그런 인상을 주는 데 한 몫 했고요.

영화의 폭력적인 스펙터클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고어 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초현실적인 폭력 장면을 보면 심지어 식욕을 느끼기도 해요^^; <뮌헨>의 폭력 스펙터클을 문제 삼는 것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내세우는 영화이기 때문이죠. 예전에 김봉석 평론가님의 <시티 오브 갓> 평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소년들이 갱단의 일원이 되어 총을 쏘고 살육할 정도로 열악한 브라질 슬럼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했어요. 그것은 물론 끔찍하고 슬픈 풍경이죠. 하지만 김봉석 평론가님은 묻습니다. 열 살 남짓한 소년이 총을 쏘아 한 무리의 사람들을 사살하는 장면에서 당신은 솔직히 약간의 쾌감도 느끼지 못했냐고. 저는 그 질문에 거리낌없이 '느끼지 못했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물론 살인에 어떤 죄책감도 부여하지 않는 할리우드 오락 영화 같은 맥락에서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살인 장면의 화면 구도나 색감은 시각적으로 즐거울 만큼 스타일리시했거든요.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폭력을 즐기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김봉석 평론가님도 예로 들었던 <킬빌> 같은, 처음부터 아예 거짓임을 전제한 폭력 영화가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저도 찬성합니다. 하지만 스크린 속의 폭력이 지구상의 어떤 사람, 우리 곁의 어떤 사람, 혹은 당장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실화라면 다릅니다. 그런 영화를 보는 것은 이를테면, TV 뉴스에 보도되는 이라크 전쟁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즐거워해서는 안되고,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관객의 최소한의 인간성이고 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의 스펙터클이 관객을 얼마나 폭력에 둔감하게 만드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실제적인 폭력을 즐기도록 조장하거나 많이 보여주는데 급급해하지는 않아야한다는 겁니다. 제가 폭력의 스펙터클을 실화와 연결하는 감독에게 신중한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물론 <뮌헨>이 이 상황을 즐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지 보라,고 말하는 듯 폭력적인 장면을 줄줄이 늘어놓기에 바쁘죠. 강박적이고 조바심 내는 태도로요. 영화가 폭력을 전경화하는데 몰두하는 동안 정작 사람들은 소외됩니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에브너가 "그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며 히스테리컬한 피해 의식과 상처를 드러낼 때, 느닷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저 혼자만이었을까요? 그만큼, 주인공인 동시에 영화의 주제였던 그 개인에 대한 영화의 관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누구라도 그런 상황을 겪게 되면 마음이 황폐해진다는 피상적인 사실 외에 우리가 에브너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무엇이죠? <브로크백 마운틴>이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로서 평단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 것은,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그것이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캐릭터에 대한 섬세한, 그리고 인간적인 관심은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법입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에브너가 마치 미션을 차례차례 해결해가는 게임 속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뮌헨>은 그 점을 놓쳤던 거고요. 어쩌면 '보편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네요.     
by 박우진 | 2006/02/22 11:58 | 컬럼 | 트랙백(1) | 덧글(47)
정치적으로 올바른 <뮌헨>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 1

영화 리뷰에는 어떤 요소가 포함되어야 하는 거냐고 누군가가 제게 물었습니다. 글쎄요. 당신이 느낀 것, 당신이 생각한 것이겠죠. 저는 좀 곤란해 하며 대답했어요. 영화 리뷰라는 건 대학 입시 논술처럼 정형화된 글이 아니어서 일정한 형식에 구애 받지 않을수록 더 진심으로 쓸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아, 대신 정치적으로 위험한 부분은 지적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라고 덧붙였습니다. 영화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까지는 좋지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여자나 장애인이나 게이나 특정 국적을 지닌 사람들이 우스꽝스러워지거나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내러티브 상의 갈등을 편리하게 봉합하기 위해서 부적절한 편견이나 상식, 구조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상업 영화에서 이런 부분은 전면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교묘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간과하기가 쉽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부분이 무례할 수 있는지, 위험할 수 있는지 알고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영화 <뮌헨>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만든 후 “<쉰들러 리스트>에 이어 두번째로 힘들게 만든 영화다. 다시는 팝콘을 먹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말로 <E.T>의 시절에 영원한 안녕을 고했습니다. 그만큼 그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고 전환점이 된 영화죠. 그는 심지어 “이 영화를 만들면 유대인 친구들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각오를 했다는 뜻이었죠. 아니나 다를까 <뮌헨>은 전격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기 이전부터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때는 1972년. 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독일 뮌헨에 팔레스타인 테러단인 ‘검은 9월단’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에 침입하여 그들을 인질로 삼은 후 인질극을 벌이다가 결국 선수 모두를 살해하죠. 이스라엘은 분노합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암살단을 조직하죠. 에릭 바나가 연기한 아브너는 폭탄 제조 전문가, 서류 위조 전문가 등으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검은 9월단’ 멤버들을 살해하러 떠나죠.

저널리스트인 조지 요나스가 쓴 <복수>를 각색해 만든 이 이야기는 실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제법 그럴 듯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이 영화를 탐탁치 않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죠? 그들은 일단 이런 복수극의 존재를 완강하게 부인합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도 같은 국가를 위해 일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의의를 의심하지 않던 아브너는 그러나 테러범들을 하나 하나 처치해가면서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가 만난 테러범들은 대체로 괴물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었고, 테러범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의 희생은 없도록 하겠다는 처음 의지는 실질적으로 실현하기가 어려우며, 무엇보다도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폭력에는 폭력으로 갚아주겠다는 대응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뒤집어 보면, 아브너 역시 ‘검은 9월단’과 다름없는 테러범인 셈이잖아요.

이스라엘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팔레스타인인도 유대인도 아닌 제 3자의 시각에서 보면 <뮌헨>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입니다. 폭력이 폭력을 낳는 현재 국제 정세에 대한 비판 의식도 시기 적절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인간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요. 국내 언론의 리뷰들도,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 후한 점수를 준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하지만 솔직히 저는 이 영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by 박우진 | 2006/02/17 11:58 | 컬럼 | 트랙백 | 덧글(22)
<왕의 남자> 원작 연극 <이>를 보러 가다 3
 
저 자신이 문화적 감수성을 독서로부터 얻었고, 그림이나 영상을 만들기보다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긴 하지만 제겐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여러 방식들을 두루 향유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침묵도 필요하고 잡담도 필요하고 토론도 필요하고, 스킨십과 눈빛 교환도 필요하듯이 소설만 읽어서는, 영화만 봐서는 살 수 없어요. 때론 연극도 봐야 하고 노래 가사를 음미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이야기지만, 다 같은 이야기는 아니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 구절은 원론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것들인 반면에, 좋아하는 노래 가사는 센티멘탈하고 간결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이 다르고, 그 방식에 따라 적절한 내용과 표현이 있기 때문이죠. 저는 그것들이 잘 어울리는 순간을 발견했을 때 즐거워합니다.

그러므로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 저는 줄거리를 좇아가기 위해 급급해하지 않아요. 제가 연극이나 영화에서 얻기 원하는 것은 한 문단의 시놉시스가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어떤 장면을, 화면의 구조를, 장면과 장면 간의 연결을, 어떤 표정을 얻기를 원합니다. 언어가 아닌 비언어로 일러주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감동하기를 원합니다. 글 한 구절을 외우는 것은 다른 사람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연극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되새기는 것은 나만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연극을 볼 때는 연극적인 요소를, 영화를 볼 때는 영화적인 요소를 눈여겨보게 됩니다. 매체 나름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것을 변주하려는 매체적 시도를 지지하게 되고요. 물론 가끔은 머리로만 이해가 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만 그런 경우에도 최대한 관용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왜냐하면 무대나, 카메라를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이용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연극이나 영화보다는 그런 것들이 적어도 더 정성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제가 말하는 '영화적' 요소라는 것이 <야수>에서 남용된 줌인 줌아웃, 핸드 헬드 등의 기법처럼 화면을 현란하게 만들고 카메라의 존재를 끊임없이(혹은 피곤하게) 인식시키는 기술적 측면의 요소는 아니에요. 오히려 찰리 채플린이라는 배우의 얼굴에 가득 새겨진 페이소스를 고요히 응시할 줄 아는 <시티 라이트>의 클로즈업 쪽에 가깝죠.
 혹은 막 남루한 농장을 탈출해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펠레의 걸음을 연민의 심정으로 그러나 결코 감상적이지 않게 응원하는 <정복자 펠레>의 사려 깊은 부감의 시선이나, 겉으로는 활달하고 아름답지만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한 여자의 황량한 내면을 은유하듯 망연히 거울 앞에 벌거벗고 앉은 그녀를 담아낸 <스테이션 에이전트>의 정적인 미장센 같은 것들이죠. 혹은 일제시대 독립 운동을 한 혐의로 김주혁이 고문을 당하는 끔찍하고 처절한 장면에서 한순간 푸르고 평화로운 창공의 풍경으로 도약해버리며 박경원이 진정으로 소망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청연>의 대담한 편집이나


여인의 육체를 탐하듯 미끄러지는, 그야말로 손과도 같은 <더 핸드>의 촉시적인 카메라, 주로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을 담당한 성우의 근엄한 목소리로 '이 영화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오마주 같은 거 아님' 같은 발랄한 구절을 읊도록 함으로써 냉소적인 우화의 성격을 드러내는 <신성일의 행방불명>의 그로테스크한 나레이션이죠.



연극 <이>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졌군요. 결론은 단순명쾌합니다. <이>가 연극적이어서 좋았다는 거예요. 결국 영화 이야기를 하고 말았지만 직업병이라고 이해해주세요^^; 연극적이고, 영화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건 그저 제 취향일 뿐이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께도 그런 즐거움을 조금은 나누어드리고 싶었습니다.
by 박우진 | 2006/02/15 11:58 | 컬럼 | 트랙백(1) | 덧글(3)
<왕의 남자> 원작 연극 <이>를 보러 가다 2

두번째 이유는, 장생 역에 캐스팅된 배우 감우성이 아닐까 해요. 사실 처음부터 장생 역에 감우성이 캐스팅된 건 아니었어요. 내정되었던 배우가 군복무 문제로 출연할 수 없게 되면서 그가 맡게 된 거죠.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좀더 어리고 건들거리는 장생을 보게 되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캐릭터는 배우의 몸을 빌어 미묘하고도 결정적으로 변주되는 법. 감우성이 연기한 장생은 묵직하고 호탕하고, 처연하죠. 마치 오래된 가구 같다고 할까요. 한 구석에 조용히 놓여 있어도 그 존재감으로 방 전체의 공기를 장악하는, 오래된 가구 말이죠. 감우성이 그런 기운을, 장생에게 불어 넣습니다. 본래 이미지만으로 만들어낸 캐릭터는 아니었어요. 감우성은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이도록 줄을 타고, 시나리오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았던 얼굴의 상처를 스스로 그려넣었죠. 그 상처는 장생의 히스토리이자 일종의 <왕의 남자> 외전이에요. <왕의 남자>가 시작하기까지 장생이 겪었을 풍파가 배어나죠. 감우성은 말합니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맨몸으로 장터에서 뛰고 구르며 궁에까지 입성한 장생에게 어떤 삶의 고비나 절절한 사연 하나 없을리 없다고. 그러니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한 입가의 상처가 숱한 이야기를, 말도 없이 증언하고 있는 셈이죠.

결과적으로 영화 속의 장생은 연극 속의 장생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통찰적인 캐릭터로 탄생했어요. 연극에서와는 달리 보스 기질이 강하고, 연산과 공길의 만남의 모티브가 됨으로써 이야기를 추진해가는 그는, 공길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가이드가 되죠. 영화를 관통하는 무게 중심이자 이야기와 관객을 매개하는 필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자, 다시 무대로 돌아가 보죠. 연극은 여러 명의 남자들이 열을 맞춰 추는 군무로 시작됩니다. 무대 뒤에선 우는 듯 웃는 듯 일그러진 가면이 흔들거립니다. 남자들의 몸이 빚어내는 격정적이면서도 강박적이고 음울한 동작들은 연산의 심정을 은유합니다. 쿵쿵, 심장박동처럼 보이고 들리는 이 군무가 연산의 내면의 풍경인 거죠.

그 외에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어요. 무대 뒤쪽, 한지를 바른 문을 통해 녹수가 연산의 아이를 낳는 모습이 실루엣 처리 되는 동안 무대 앞에서는 연산이 공길의 몸을 채찍으로 내려치는 장면도 그 중 하나였죠. 한낱 그림자로 표현된 녹수가 연산의 마음에서 저만치 물러나 버렸음을 암시하기도 하고, 비정상적으로 확대된 그 그림자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앞날의 비극을 예고하기도 하죠. 매를 주고 받는 연산과 공길 간의 애증과, 연산의 내적 갈등이 보이는가 하면, 연산을 둘러싸고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 녹수와 공길의 욕망과 고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의미가 미니멀한 무대, 단 하나의 상황으로 표현된 거죠.

'놀이' 역시 영화와는 다르더군요. 무대 위의 광대들은 영화에서보다 한층 마당극에 가까운 익살을 펼쳐보입니다. 소소하고 어처구니 없는, 말장난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섞어가면서요. 무대를 방정맞게 가로질러가거나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며 눈길을 끕니다. 웅장한 구조와 현란한 색감으로 품격을 내세웠던 영화 속의 '놀이' 장면과는 또다른, 주거니 받거니 친밀한 즐거움이 거기에 있더군요.

이런 것들 때문에 저는 <이>를 좋은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역학 관계와 인물의 심리를 '놀이'의 형식으로 풀어낸 창의적인 전복성과, 그것을 뒷받침 하는 캐릭터 묘사, 이야기 구성도 훌륭하지만 그런 내러티브적인 요소 이외에 진정으로 '연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에서 제가 꼽았던 장면들을 그대로 영화화했다면 어땠을까요? 몸동작의 질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지 않는 스크린의 군무가 과연 난해한 추상성이 아닌 피부에 와 닿는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요? 문 뒤의 녹수, 문 앞의 연산과 공길이라는 세 겹의 관계가 얇디 얇은 스크린에 담겼을 때, 무대에서의 깊이감과 다층적인 분위기를 드러낼 수 있었을까요? 무대 위의 광대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과연 관객들을 마주하고, 삿대질을 해가며 쏟아놓았던 말의 맛과 익살을 고스란히 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극을 볼 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들이란 무대 위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연극적인 것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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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우진 | 2006/02/10 11:58 | 컬럼 | 트랙백 | 덧글(5)
<왕의 남자> 원작 연극 <이>를 보러 가다 1


가끔 연극을 보러 갑니다. 연극을 보는 이유는, 그것이 소설과도, TV드라마와도, 포털 사이트의 뉴스와도, 친구와의 전화 통화와도, 영화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열거한 모든 문화 장르와는 또다른 종류의 정서적 경험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배우들의 호흡이, 입가의 경련과 손가락의 움직임이, 발소리가, 때로 삐끗하며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를 일그러뜨리는 애드리브와 예기치 않은 웃음과 입술을 뛰쳐나온 침 한 방울이, 활자나 카메라라는 비인간적인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내 눈과 귀와 피부에 우르르 무너지는 느낌. 평소 지구로부터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던 별의 궤도가 마침 우리집 지붕 위를 지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 같은, 그 생생하고 낯설고 아뜩해서 섬찟하기까지 한 느낌이 가끔 미치도록 그리워집니다. 제 경우에는 그럴 때, 문득 살아있음을 깨닫곤 해요. 아무리 3D 기술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저 폴라 익스프레스가 감히 스크린을 뚫고 나올리 만무함을 알고 있는, 비인간적이고 안전한 극장 관객석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감정이죠.

그래서 가끔, 여행을 가듯이 연극을 보러 갑니다. 얼마전에는 <왕의 남자> 원작인 <이>를 보러 갔었어요.

줄거리와 캐릭터는 많이들 아시리라 생각해요. 주요인물은 네 명이죠. 연산군과 장녹수, 공길과 장생이에요. 연산군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앞에 무기력했던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장녹수는 그런 연산의, 어머니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죠. 공길과 장생은 광대예요. 하지만 그들의 성격은 영화에서와는 조금 달라요.

영화에서는 한 송이 꽃처럼 여리고 순수해서 연산과 장생, 두 남자의 욕망을 촉매하는, 이를테면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었던 공길이 연극에서는 좀더 지능적이고 권력지향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의 처선의 꾀와 공길의 미모를 합친 데다 장생의 보스 기질을 가미한 것과도 같아요. 연산의 총애를 받은 그는 궁 안의 광대를 총지휘하는 위치에 오르는데, 연산 앞에서는 아부를 하고, 휘하의 광대들 앞에서는 제법 권위를 세우는 그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분열적이죠. 공길 역의 배우는 치렁치렁한 옷자락으로 몸을 꽁꽁 싸맸던 이준기와는 달리 종종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드러냅니다. 천장에 닿을 듯 하이톤의 목소리도 날카롭고 강단이 있어요.

이에 반해 장생은, 영화에서보다 훨씬 순진하고 우직한 인물이에요. 속이 훤히 보이고 더 단순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한량 기질이 농후한 그는 줄곧 일관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공길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광대로서, 그리고 공길에 대한 감정으로 궁에 입성하(는 듯 보이)지만 권력이나 명예, 돈과 출세에는 한톨 관심 없이 그저 바람처럼 자유롭게 노닐고만 싶어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공길이 일종의 판타지였다면 연극에서는 장생이 판타지인 셈입니다. 이런 뒤바뀜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일단, 게이 코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연극보다 대중적이고 비현실적인 장르이고 따라서 상식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해요. 그건 자본이나 제작 과정 상의 문제이기도 하죠. 영화는 연극보다 많고 다층적인 사람들과 돈의 관여로 만들어지잖아요. 독립영화가 아닌 이상, 사람들 간의 합의점과 넓은 범위 관객층을 소구할 수 있는 지점이 필요하고 그 수위가 상식선에서 조율되는 경우가 아무래도 많겠죠. 그것이 영화의, 특히 상업 영화의 기본적인 태도가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왕의 남자>에서 <이>의 게이 코드를 주 도화선으로 가져오려다 보니 어떤 절충점이 필요했을 거라고 봐요. 그것이 공길 역의 이준기였을 거고요. 많은 퀴어 영화들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사랑 받는 남자를 아름답게 치장하죠. 왜냐하면 그 남자가 (마치 여자처럼)아름다워지면 아름다워질 수록, 그에 대한 다른 남자의 욕망을 용납하기가 시각적으로 수월해지기 때문이에요. 떠올려보세요. <해피 투게더>의 장국영을, <토탈 이클립스>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그들의, 일시적으로나마 성(性)을 잊어버리게 하는, 유약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그 미학적인 아름다움은 정치성이 거세된, 순수함으로 오인됩니다. 그리고 한 남자라기보다는, 한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설득시키죠. 그것을 위해 배우 이준기의, 중성적인 매력이 선택되었을 거예요. 캐릭터의 외형 뿐 아니라 성격 역시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바뀌었겠죠. 세속적인 욕망을 좀처럼 내보이지 않는 그는 현실적인 인물이 아니예요. 마치 천사처럼 다른 이들을 위무하고, 연산과 장생을 비롯한 관객 모두의 애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by 박우진 | 2006/02/08 11:58 | 컬럼 | 트랙백 | 덧글(8)
신년 화두: 나는 저널리스트인가? 에 대한 뜬금없는 사유 2
그러므로 다시 한번, 월간지 매체, 특히 영화 등 '문화' 잡지의 본분은 진실 규명보다는 진실에 대한 해석에 가깝다. 월간지에서는 청와대의 구구절절한 공식 발표보다는 그에 대한, 우리 동네 수퍼 아저씨의 "개소리"라는 신랄하고 명쾌한 단 한 마디의 평가가, 물론 매체의 편집 방향과 기조에 맞기만 하다면야, 더 굵고 날카로운 글자체로 인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잡지를 소비하는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치적이면서도 유희적인, 혹은 이런 식의 '정색한' 경계나 관념으로는 결코 붙들 수 없는 가뿐한 태도이다.(월간지 기자의 명함에는 'reporter'가 아닌 'editor'라는 직함이 적혀 있다)

 
이것은 물론 사적인 견해이므로 위 문단의 모든 문장의 끝에는 '라고 생각한다'라는 문구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다른 직업이 아닌 영화 잡지 기자를 업으로 선택할 때 고민했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다. 글쓰기와 영화보기를 좋아한다는 것, 스트레이트하기보다는 만연체 인간이라는 것, 이런, 기질에 관련된 생물학적인 문제 외에, 직업을 선택할 때 고려한 '사회학적인' 사유였다. 매체가 다양해지고 그 숫자가 늘어나면서 점점 사적 견해와 취향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것, 다양성이 존중받고, 경계 없고 유연한 시각과 태도가 자연스러워지고, 이 모든 과정을 거쳐 결국 개개인의 취향은 더욱 확고해져가는(설사 현실이 그렇지 않다해도 종국엔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흐름에 가장 기민하게 대응 할 수 있는 인쇄 매체는 잡지가 아닐까, 라는 것. 그러므로 '손석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에 대한 나의 지지는 영화 잡지 기자인 나의 자존심이자 정체성인 셈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좋은 영화 잡지 기자가 꼭 좋은 저널리스트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내가, 뜬금없이, 과연 나는 저널리스트일까? 를 고민하게 된 이유는 '저널리스트'라는 명칭이 다만 어떤 직업 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어떤 태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적인 글이라고 나쁜 글이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글일리는 없다. 사적인 문체는 오히려 읽는 이의 심적 방어막을 허물어뜨려 내밀한 부분을 건드릴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문제는 보편성이다. 얼마나 바로 내 이야기이면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는가. 특히나 기자가 쓰는 글에선, 매체의 타깃이 되는 독자층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감동을 주는 글의 매력이 상상력일 수도, 유려한 수사일 수도, 날카로운 성찰일 수도, 감수성이나 교양, 유머감각일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의 기본은 경험이다, 라고 아직은 상상력도 수사도 성찰도 감수성도 교양도 유머감각도 빈곤한 나는, 생각한다.

좋은 글을 쓰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고, 기자란 그 두 가지 목표의 접점에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고, 취업을 준비하던 재작년 겨울 어느 면접에서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내 경험은 그때보다 얼마나 더 풍성해졌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삶의 풍경들이 나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로, 적확하고 설득력있는 단어와 문구들로 표현해낼 수 있을 만큼 구체적으로 다가왔을까. 나는 얼마나 '저널리스트적'으로 살았고, 글을 써 왔을까. 과연 나는 저널리스트일까. 대답하려니 자신이 없다.

나는 좋은 기자이기 이전에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고, 그게 어떤 분야가 됐던, 기사이건 에세이건 시건 소설이건 좋은 글은 저널리스트적인 태도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혹은 저널리스트적인 태도마저 없다면 도저히 좋은 글을 써낼 자신이 없는, 재능과 상상력이 결핍된 채 영원히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저널리스트인가?'라는 질문은 올 한해, 나의 절실한 화두가 될 것 같다. 새해 벽두, 눈을 뜨자마자 발견한 신기주 기자의 글을, 나는 진정 하나의 계시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한번쯤은 이렇게 재미없고 거창하게 늘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쓰고 나니 창피하지만, 마음이 좀 든든해졌다.

by 박우진 | 2006/02/03 11:58 | 컬럼 | 트랙백(1) | 덧글(3)
신년 화두: 나는 저널리스트인가? 에 대한 뜬금 없는 사유 1
새해를 맞아 개인적으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개안수술과 운전면허. 내친김에 이번 구정 연휴에 전자부터 해치웠다. 내 눈은 라식이 안 된다기에 노터치란 수술을 받았다. 통증이 좀 있으실 거예요. 간호사의 눈매가 애처롭게 일그러졌다. 아, 예. 각오는 했지만 그 정도이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아팠다는 뜻이다. 이틀간 암흑이었다.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와 눈꺼풀이 야구공만하게 붓는 바람에 도대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주기적으로 눈가에 말라붙은 눈꼽이라도 떼 주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눈이 붙어버릴 것 같았다. 아프면 처량해지는 법이라, 이대로 영영 눈을 감게 되는 것은 아닐까, 주책 맞은 생각을 해봤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그 암흑을 통과하고 바야흐로 삼일째, 게슴츠레하게나마 다시 눈을 뜨고 부옇게나마 다시 보게 되었을 때의 그 환희란. 그야말로 말그대로 새.해.가 도래한 것이다. 할렐루야.
 
보이지 않는 삶의 가장 큰 맹점은 심심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눈을 감고 있던 이틀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새로운 견해와 엉터리 같고 사랑스러운 발상들이 전해지고 논해지고 사라져갔을까. 보고 읽는 것을 즐기다 못해 어느 정도는 중독되어 있는, 어쩔 수 없는 시각중심적 인간인 나는 눈을 뜨자마자 무엇이든 읽을 것을 찾아 헤맸다. 마침 눈에 띈 것은 며칠 전 사다 모셔놓은 2월호 <GQ>! 그리고 마치 계시처럼, 신기주 기자의 글이 나타났다.
 
'나는 무엇을 기록하는가'라는 제목이 달린 그 글에서 그는 '저널리스트의 본분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며 '기록의 가치를 훼손하는 방구석 저널리스트'의 습성을 떨칠 것임을 분분히 다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몇 달 전 진행했던 '손석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크리틱 꼭지로 손석희 아나운서의 항의 전화를 받았던 모양이다. 당시 전화 상 '토론'의 요지를 적은 후 그가 내린 결론 "현장과 부딪히지 않는 기사는 소비될 수밖에 없다. 기록하지 않는 기사는 생명력이 없다"라는 문장들이 <해리 포터>의 하울러처럼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다.
 
기록하지 않는 기사는 생명력이 없다. 나도 알고 있다. 팩트가 부족하면 수사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이것은 절대로 반박의 의미가 아니다!) 중요한 건 무엇을 기록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특히 신속, 정확한 정보 전달이 보도의 제 일 목적인 실시간 매체, 일간지가 아닌 월간지의 경우에는 더더욱. 태생이 그렇다. 한발 늦은 만큼 한 뼘 깊던가, 한 각도 삐딱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기존의 정보를 재가공한 것이 월간지의 주력 콘텐츠가 되는 것이다. 객관적 진실을 토대로 주관적 진실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랄까. 기록의 대상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다/아니다로 규정지어지거나 옳다/그르다로 판단될 수 없고, 따라서 팩트의 범주로 묶이기 어려운 많은 의견과 취향들이 월간지에는 기록된다. 그렇기에 월간지에선 때론 주관적이고 비전형적인 기획이 가능하고, 그것이야말로 월간지의 캐릭터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신기주 기자가 자신의 글에서 예로 들었던 '손석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기사에 대해서, 그 대담하고 창의적인 발상에 대해서 나는 지지한다. "본인에게 알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서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니며 직접적으로 그를 취재하지 않고 간접적인 의견을 모아서 쓰는 방식은 긍정적이지 않다"는 손석희 아나운서의 반박 역시 충분히 존중하지만 손석희 아나운서가 다만 '손석희'라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인구에 공공연히 회자되는 중요한 언론인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한국 언론의 보도 형태의 한 스타일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손석희'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 그 기표에서 연상되는 사회적인 기의가 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 사회의, 하나의 '현상'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각계의 의견과 취향은 (물론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팩트는 아닐지라도)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손석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여론을 불러 일으키는 구체적인 촉매제인 셈이다.
 
by 박우진 | 2006/02/01 11:58 | 컬럼 | 트랙백 | 덧글(5)
이토록 수상한 B형 남자, 지진희 4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온 사람들, 아픔도 하나씩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봄날>의 고은호도, <대장금>의 민정호도 아닌 배우 지진희로 남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배우의 역할이란 무릇 대중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때론 그 판타지가 담배 한 모금이나 술 한 잔처럼 고단한 현실을 위로한다. 그것이 폐가 좋지 않다는 건강검진 결과나, 아침의 숙취처럼 부질없고 유해한 망상일지라도 나는, 영화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을 남자 친구 삼는 사춘기 소녀의 망상을 탓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그들에게 ‘나는 고은호도 아니고 민정호도 아니다’라는 지진희의 선언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그런 무지개 같은 환상을 깨주고 싶어요. 그런 사람 없거든요.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잘 포장된 이미지도 멋있지만 그 사람이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 때 팬들이 느낄 실망감까지 생각해보면 나를 배우 지진희로 봐달라는 것이 그렇게 가혹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을 판타지로 옭아매는 시선에 저항하려 했다. 그리고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해두려고 했다. 그건 배우로서의 욕심이고 직업의식이다. 배우란, 그에게 철저히 직업이다.

 

"나는 인간 지진희일 뿐이에요. 배우가 아닌 나의 모습은 대중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나도 내 자유를 느끼고 싶거든요.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발가벗은 느낌이에요. 거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위안 받고, 힘을 얻을 수 있는 내 사생활까지 보이고 싶진 않다는 거죠. 팬들이 지진희를 사랑한다면 인간 지진희를 인정해주었으면 해요." 



우리는 제 이미지에 갇혀 질식사한 아이돌 스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지진희의 이런 단호함은 결국 배우를 평생직업으로 삼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평생 할 거에요. 이제 얼굴 다 팔려서 다른 일도 못해요.(웃음) 그렇다고 역사에 길이 남을 대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고. 내가 연기하는 이유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예요. 평생 직업으로는 이것처럼 훌륭한 직업이 없는 것 같아요. 정년퇴직도 없잖아요.(웃음)" 

 

슬쩍슬쩍 농담을 섞어가며 늘어놓는 이 남자의 너스레에 그러나, 방심해버리면 안 된다. 착해 보이는 눈은 검고 깊다. 그 어둠은 무(無)지만 또한 어떤 것이 감추어져 있을지 모르는 미지이기도 하다. 그 눈빛이 신랄해지는 순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인기요? 그건 그냥 순간이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 혹하긴 해요. 하지만 팬들이 오빠, 오빠하는 모습, 물론 고맙고 즐겁지만, 너무 오래 갖고 있으면 안돼죠. 으쓱한 만큼 나중에 초라해지니까. 내가 이랬는데 너희들 뭐야 그런 마음이 생겨요. 세상 사람들이 내 발밑에 있는 것처럼 붕 뜨는 그런 기분, 거품이죠. 눌러줘야 해요. 그렇지 못하면 나중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허공에서 헤매게 되니까. 그런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우리 다 봤잖아요."



그의 이런 냉소는 아마도, 새삼스럽지만, 여러 직업을 거친 뒤 제법 늦은 나이에 배우로 데뷔한 이력 때문일 것이다. 배우로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성장한 후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의 고민과 판단과 결심의 부산물.

 

"주변에서 자기 아이가 예쁘다고 연기자 시키고자 하는 부모도 많아요. 솔직히 자기 자식, 다 예쁘죠.(웃음) 그런데 객관적으로 봐서 안 예쁘고, 안 될 것 같으면 난 다 얘기해줘요. 정말 하고 싶다고 하면 대학교 졸업한 다음에, 배울 거 다 배우고 사회생활 좀 경험해보고 자기 관리 하는 방법도 익힌 다음에 하라고 해요. 그때도 늦지 않아요. 어차피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되니까."



2000년에 데뷔했으니 벌써 7년째다. 지난 행보에 대해선 ‘후회 없다.’ 당시에는 최선을 다 했으니까, 라는 것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이유다. 이미 지나간 일 후회해 뭐해요, 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하더니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관리가 철저한 안성기 선배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뷰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더 이상 헛갈리지 않았다. 그에겐 언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천진함과 치열함, 쿨함과 예민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 그런 자신의 삶을 한 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해주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듣기엔 그랬다.


“현재가 가장 중요하죠. 현재에 충실하면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되는 거니까.”

by 박우진 | 2006/01/27 11:59 | 컬럼 | 트랙백 | 덧글(3)
이토록 수상한 B형 남자, 지진희 3
지진희를 만나러 가기 전 예전 인터뷰 기록을 뒤져보았다. 그의 스크린 데뷔작은 <H>였다. 그 이후 <여섯개의 시선> 중 한 에피소드와 <퍼햅스 러브>에 출연하긴 했지만 하나는 단편이었고, 하나는 조연이었으니 장편 영화의 주연을 맡은 것은 <H> 이후 약 5년만의 일인 셈이었다. <H>에서 열혈 형사 역을 맡았던 그는 혹독한  '숙제'로 스크린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각 인물에 대해 상세한 리포트를 써서 제출하고 몸을 만드는가 하면, 생전 못해본 험한 욕을 입에 붙이기 위해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에 비하면 '감독님과 의논해가며 석규 캐릭터를 만들어 갔다'고, 힘 하나 안 준 말투로 이야기하는 이번 영화는 '헐렁한 양복' 같았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어색했던 <H> 이후 3년 동안 얼굴이 많이 두꺼워지기도 했고(웃음) 이번에는 정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죠. <H>는 굉장히 계산된 영화였어요. 노출 맞추는 데만도 최소한 하루 이틀이 걸릴 정도였으니까. 거기에 끼워 맞춰지는 경험이었죠. 하지만 이번 영화는 다들 널부러져 있는데 내가 들어가서 같이 널부러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껄렁하고 수상한 석규 캐릭터가 딱 맞는 옷이었다니.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TV 이미지는 대부분 '지진희스러운' 것이다. 점잖고 마음이 깊고 든든하고  때로는 조금 지루할 만큼 건전한 남자. 그건 전략적인 선택이었냐고 물었다. 지진희는 자신의 이미지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고 영리한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략적인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우선 감독들이 내게 악역을 안 주더라고요.(웃음) 그렇다고 굳이 악역을 할 필요도 없었고. 나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재미있으면 상대방도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일종의,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했다.

"내가 전에 맡았던 역할들은, 내가 보기엔 매우 매력적인 역할들이었어요. 주조연급 캐릭터를 많이 맡았는데, 오히려 주연들은 좀 뻔하지 않나요. <줄리엣의 남자> 때는 내가 지켜야 할 것, 해야 할 일, 사랑까지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생각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캐릭터로 현실적인 매력이 있었고 <러브레터> 때는 한없이 착하고 순진하고 답답하기까지 한 신부님이었는데 사랑하는 여자 떄문에 고민하고 자신보다는 저 친구가 낫겠다 싶어 돌려주는 마음이 매력적이었고, <대장금>은 아시잖아요. 민정호의 방식이라고 부를 만한 사랑을 보여주잖아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지켜봐주고 같이 아파해주고 필요한 부분 채워주고, 기다려주고. 멋있지 않을 수 없는 남자인 거죠."

그의 말에 따르면,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없다. 그 내용에 공감한다기 보다는, 자신이 맡았던 캐릭터를 하나 하나 불러내어 설명하는 그의 섬세하고 열정적인 태도 떄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몸을 스쳐간 그들을 한없이 아끼는 마음으로 세포 안에 고이 저장해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는 어떤 캐릭터를 맡던 온전히 납득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배우일 것이다. 그 과정은 그에게 하나의 즐거운 유희이거나 책임감에서 발로한 합리화이거나, 혹은 둘 다일 것이다. 그의 재능은 그것이다. 내가 함부로, 섣불리 '지진희스럽다'고 단정해버렸던 한 카테고리 안의 인간 군상을 구별하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심지어 사랑할 수 있는 세심한 감수성.

"그런 부분, 지진희가 연기하는 비슷한 듯 다른 캐릭터들의 면면을 관객들도 좀 찾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시청자나 관객은 속고 있어요. 어떤 인물이든 카메라가 부각시키는 면이 먼저 보이게 마련이에요. 사실 앵글 하나 바꾸면 또 다른 면이 보이는 거고, 또 다른 영화가 나오는 거거든요. 어떤 캐릭터든 간에 애정을 갖고 살펴보면 그것처럼 재미있는 게 없어요. 제 팬들 중에는 20대 중후반?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온 사람들, 제각기 아픔도 하나씩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다보니 저를 보며 그런 또다른 면을 찾는 데서 재미를 느끼시더라고요. 쟤가 저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표현하나 살펴보는 거죠. 일반적인 캐릭터지만 뭔가 특별한 면이 있을 거다. 저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자연스럽고 튀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분명히 매력을 감춘." 
by 박우진 | 2006/01/25 11:59 | 컬럼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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